작년 여름 BSW Building Service Worker라는 단기과정에 다녔다. 1주일 동안 이론교육을 받고 3주간 한 고등학교에 가서 프랙티컴을 했고 4주간 총 6회의 테스트를 치렀고 나는 쓸데없이 필기테스트 평균 99%로 수료했으나 프랙티컴 도중 손목터널 증후군이 심하게 와서 결국 취업을 포기했었다.
이 프로그램 수료생은 거의 100% 교육청이나 시청 기관들에 취업이 된다. BSW는 빌딩의 일상적인 관리를 하는 직업인데 쉽게 말하자면 주 업무는 청소다. 언어가 부족한 외국인이 할 수 있는 괜찮은 시급의 가장 안정적인 직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같은 클래스에 필리핀 출신 몇 명이 파친코 촬영장 근처에 가서 이민호를 봤다며 키도 크고 너무 잘생겼다고 흥분하며 자랑했었다. 리치먼드 어디에 세트장을 지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때 파친코라는 드라마에 대해 처음 알았고 그 뒤로 애플 TV와 한국 언론들의 대대적인 광고와 홍보 덕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고 전편이 공개됐을 때 애플 TV 1주일 트라이얼을 이용해 시청할 수 있었다. 재밌게 봤지만 사실 여러모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원작을 읽으니 그 아쉬움들이 모두 해소된 기분이다.
이번에 그림 선생님이 우연히 이 책들을 빌려주셨다. 노안이 오면서 사실 몇 년 동안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겹쳐 보이거나 어른거려서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워 책을 읽으면 두통이 왔다. 최근에 이 나빠진 눈에 좀 익숙해지면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으니 몇 가지의 소회를 적어봐야겠다.

일단 술술 읽혀서 좋았다. 영어 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이 부분은 아마도 번역자의 공이 클 것이다. 영어는 단순하고 명확한 표현이 특징이지만 아 다르고 어 다른 한국말만의 미묘한 말맛과 그림을 보는듯한 디테일한 묘사들이 대단했다. 이미정, 이분의 다른 번역서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소설은 어린 양진이 입술이 갈라지고 다리가 불편한 훈이에게 시집와서 선자를 낳고 선자의 아들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의 생활과 일본으로 건너온 후 전쟁과 패전, 그 이후 한국 전쟁과 분단, 일본 내에서의 혹독한 차별.. 이 모든 세월을 버티며 살아온 이들의 일대기를 빠른 호흡으로 휙휙 그린다.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구경하면서 때론 기쁘고 때론 슬프고 화내고 걱정하고. 감정이입과 공감, 이런 게 바로 소설의 묘미다.
대부분의 보통 한국인들도 버텨내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더구나 개 돼지 취급을 받는 일본 내에서의 한국인, 게다가 여자의 삶이란 정말 처절 그 자체였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양진은 친정이 찢어지게 가난했고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갔고 그나마 남편은 일찍 죽었고 선자 이전에 아이들을 줄줄이 잃었다. 훈이는 언청이에 다리는 기형이었다. 선자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임신한 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버지가 다른 두 아들을 가졌고 남편과 큰아들을 앞세웠다. 한수는 부자고 강하지만 자신의 아들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아버지였고 결국은 자신의 존재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게 됐다. 선자의 남편 이삭은 부자에 미남이지만 몸이 허약했고, 착하고 아름다운 경희는 불임이고, 요셉은 책임감 강하고 몸도 건강하지만 그래서 나중에 이 모든 걸 잃었을 때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노아는 똑똑하지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섬세한 성격이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자수는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했지만 아내를 일찍 잃었다. 그리고 일본에 사는 모든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될 수도 조선인이 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캐나다에 살면서 지금은 캐나다 국적으로 살고 있지만 이들이 내가 캐나다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내가 뼛속까지 한국인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내 아이들의 경우, 특히 딸내미는 4살부터 여기 살면서 캐나다의 교육을 받고 캐나다의 언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건 자명하다.
딸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미 자기 얼굴이 다른 클래스메이트들과 다르다는 걸 의식하기 시작했고 눈이 동글동글한 편인 데도 눈을 위로 찢는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이민자로서 뚜렷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방인이라는 그 자체가 나를 위축시키고 불편하게 하고 뿌리 없이 부유하는 존재로 만든다.
소설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해 경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로 끝난다. 첫 문장에서 이미 이 스토리가 굉장히 진취적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역사를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냈고 이들의 삶이 어떻게든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어쩌면 희망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들은 각자의 결핍에도 나름의 성공을 거두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이 부분이 어쩌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듯도 하다. 부자는 부자대로 보통사람은 보통사람대로 각자의 세금이 있다는. 양진의 말처럼 여자의 삶은 고달프지만 남자도 아이도 그 몫의 고달픔은 있는 법이다. 어떤 이는 그 세금을 당연하고 가뿐하게 처리하고 어떤 이는 감당하려고 애쓰고 또 어떤 이는 그 세금이 버겁다고 불평만 하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선자의 어머니 양진이었다. 가난하고 배운 건 없지만 어떻게 보면 순종적이고 순응적이지만 그 시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으로 진취적인 삶을 살아온 강인한 여성이다. 이런 강인한 생명력은 선자에게서도 계속 이어지는데 어떤 상황에서든 절망하지 않고 자기 몫의 세금을 책임지며 삶을 지속해 간다.
드라마에서 선자가 일본으로 온 이후 어머니를 만나지 못한 게 너무나 안타까웠는데 원작에선 딸 곁에서 계속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게 다행이었다.
드라마에서도 그랬지만 한수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드라마 속 이민호의 모습이 겹쳐져서일까?) 강하고 유연하고 책임감이 강한, 서로 사랑하지만 내 남자는 아닌.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 결국 함께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뒤까지 그 사랑이 더 강렬하고 유혹적인 것 같다.
선자는 한수를 사랑했다. 그렇다고 이삭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성실한 아내 역할이 단지 고마움으로만 대변될까? 선자는 그 모진 세월 속에서 한수도, 이삭도, 경희, 엄마, 아버지, 노아, 모자수, 솔로몬 모두를 사랑했다. 이 사랑이 결국 그 세월을 버팅겨온 힘이 된 거다.
결국 사랑하던 아버지, 어머니, 남편에 아들 노아까지 죽고 첫사랑 한수마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점에도 선자는 계속 살아간다. 경희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파친코처럼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삶은 어떤 순간, 어떤 모습으로든 의미가 있으므로.
'잡다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년을 했어도 늘지 않는 해 먹고 사는 일 (0) | 2022.12.12 |
---|---|
티스토리 블로그 한달 현황 정리 (2) | 2022.12.06 |
언젠가 나도 노래를 잘하게 될까? (0) | 2022.11.29 |
단조로운 밴쿠버 생활에 활력 더하기 (4) | 2022.11.24 |
나의 운동 일지 (0) | 2022.11.22 |